요즘 선양 시타 지역 곳곳에 ‘한식 장어구이’ 가게들이 즐비하다. 10여 년 전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메뉴가 시타 지역의 인기 메뉴로 자리잡기까지 한 부지런한 한국 아저씨의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권일(1967년생, 한국인) 봉천장어 사장의 이야기다.
한국 대구 출신인 권일은 일찍 경북대학교 식품가공학부를 졸업했다. 중한 양국 수교 후 한국에서 중국 진출 붐이 일면서 권일도 ‘차이나 드림’을 안고 2005년에 중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원인으로 첫 중국행은 2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분하고 억울한 나머지 쓰러진 곳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작심한 그는 아내와 한국에서 모진 일을 겪으며 재기를 준비했다.
그렇게 3년 간 모은 목돈을 쥐고 2010년에 다시 중국 선양에 진출했다. 선양에 들어오자마자 ‘중국 최대 조선족 마을’로 알려진 만룽(满融·만융)촌에 자그마한 한식집을 차렸다.
이때 인생을 바꿔줄 ‘귀인’이 나타났다. 우연히 알게 된 일식 요리사(한국인)였는데 권일에게 장어 사업을 권유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인기 많은 장어구이가 선양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워보자는 욕심에 권일은 그 요리사로부터 장어를 잡는 방법, 먹는 방법, 굽는 방법 또 관리하는 방법까지 장어 사업에 필요되는 기술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배웠다.
그렇게 선양시 첫 장어구이 전문점이 만룽촌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대부분 노인들만 남아있는 교외 마을이지만 장어구이가 예상 외로 잘 팔렸다. ‘시내로 나가면 더 잘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6개월 만에 가게를 접고 시타 지역으로 이동했다.
시타 지역은 중국 조선족, 한족 그리고 한국인들이 어울려 사는 세계 유명 코리아 타운이다. 시타 지역을 선택하게 된 원인은 바로 장어구이를 현지 소비자들에게 홍보하기에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봉천(선양의 옛 이름)장어’란 가게 이름도 선양 장어구이 ‘원조’의 자부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숯불구이 가게들은 대부분 고객들이 직접 고기를 구워 먹어야 했다. 따라서 많은 고객들이 고기 굽는 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장어’는 다소 낯선 식자재였다.
아무리 관리가 잘 된 장어라 해도 덜 익거나 너무 익으면 맛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맛에 승부수를 건 권일은 이 비싼 보양식 음식을 도저히 손님들에게 맡길 수가 없어 직접 두 팔을 걷고 나섰다. 이렇게 봉천장어는 ‘사장이 직접 구워주는 장어집’이라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10여 년 동안, 봉천장어는 골목에 위치한 지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원조’의 자부심을 안고 뛰어난 맛과 서비스로 고객들의 입맛과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봉천장어는 중국 맛집찾기 애플리케이션 ‘따중디엔핑(大众点评·대중점평)’에서 근 2천 명 고객으로부터 4.8점(만점 5점)의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봉천장어를 시작으로 한식 장어구이를 하는 식당이 많아지면서 현재 이 메뉴가 시타 지역은 물론 선양 각 지역에 퍼졌다. 권일도 최근 지린성 퉁화시에 봉천장어 2부를 오픈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자 그는 사회 봉사를 시작했다. 과거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경력에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다는 그다.
현지 기금회에 성금을 기부하는가 하면 도시락집을 운영했던 기간 시타 지역 환경미화원들을 대상으로 주 1회씩 도시락 배부 봉사를 진행했었다. 코로나19 예방통제 기간에는 고향 대구에 성금을 보냈고 선양에 남아 ‘혼밥’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배달하기도 했다. 지린성 퉁화시에 오픈한 봉천장어 2부도 현지 취약자에게 경영권을 맡겨 그들에게 생활의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어느덧 권일은 시타 지역에서 10여 년의 긴 세월을 보냈다. 시타 지역의 많은 변화를 몸소 체험하면서 밤거리의 변화가 가장 인상 깊었다 한다. 과거 9시, 10시만 되면 시타 지역이 전체적으로 어두웠는데 지금은 영업도 늦게까지 하고 네온사인도 많이 들어와 굉장히 밝아졌다 한다.
시타 지역의 야간경제 활성화가 어쩌면 그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